조리스카를 위스망스
조리스카를 위스망스(Joris-Karl Huysmans)는 1848년 2월, 파리 쉬제르 가 11번지에서 태어났다. 그 집은 지금도 남아 있다. 녹색으로 칠한 둥근 이중문에 큼직한 못이 박힌 오래된 집이다. 그의 아버지 고트프리트 위스망스(Gotfried Huysmans)는 네덜란드 브레다 출신이었다. 아버지도 화가였고, 할아버지도 화가였다. 지금은 헤이그에 은거해 있는 숙부 한 사람도 브레다와 틸뷔르흐의 아카데미에서 오랫동안 회화를 가르쳤다. 이 집안은 대대로 그림을 그려왔다. 조상 가운데에는 루브르에 작품이 걸려 있는 코르넬리위스 위스망스(Cornelius Huysmans)도 있다. 다만 마지막 후손인 이 사람만은 붓 대신 펜을 들었다. 그렇다고 집안의 전통을 아주 저버린 것도 아닌 듯하다. 그는 선조들을 놀라게 했을 법한 예술서를 한 권 써냈으니까. 군청빛 바탕 위에 나뭇잎을 파슬리 잎처럼 자잘하고 꼼꼼하게 그려 넣던 화가들의 후예가,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를 옹호하다니!
“그럼 외가 쪽은 어떻습니까?” 어느 날 아침, 세브르 가의 옛 프레몽트레 수도원 안에 자리한 그의 거처에서 내가 이렇게 물었다.
“소시민 계층이었지요. 외할아버지는 내무부 출납계원이었습니다. 그래도 당신이 혈통 같은 데 관심이 있는 듯하니 말하자면, 외할머니의 아버지는 조각가였고 로마 대상 수상자였습니다. 방돔 원주 기단에 붙은 옷주름 장식 같은 것들을 숱하게 만들었고, 카루젤 개선문의 아카데믹한 장식에도 손을 댔지요. 샹젤리제 개선문의 놀라운 부조 몇 점도 아마 그 사람 작품일 겁니다.”
“조상의 작품을 그리 높이 평가하지는 않으시는군요?”
“제라르 영감은 성실하긴 해도 그저 흔한 조각가였습니다. 자기 시대 사람들보다 더 잘한 것도, 더 못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실 저는 그의 작품에 대해 존경도 경멸도 없습니다. 그저 무관심할 뿐입니다.”
나는 그가 말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위스망스는 예의 바른 고양이 같은 인상을 주었다. 몹시 공손하고 거의 상냥하기까지 하지만, 신경은 곤두서 있고,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금세 발톱을 드러낼 것 같은 사람. 마르고, 여위고, 머리카락은 희끗했고, 표정은 재빠르게 움직였으며, 어딘가 늘 성가시고 귀찮다는 기색이 배어 있었다. 첫인상은 대체로 그러했다.
“그건 그렇고,” 내가 본론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거꾸로(À rebours)』의 문학적 성공에는 만족하실 만하겠군요?”
“그렇습니다. 그 책은 예술적 감수성을 지닌 젊은이들 사이에서 수류탄처럼 터졌지요. 나는 열 사람쯤을 위해 쓰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보들에게는 굳게 닫힌, 일종의 밀폐된 책을 쓰고 있다고 여겼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정신 상태에 있었던 겁니다. 이 세기의 혐오스러운 속물성에 넌더리를 내고, 또 좋든 나쁘든 적어도 정직하게 공들여 만든 작품을 갈망하는 사람들이요. 지금 프랑스에서는 위에서 아래까지, 크건 작건, 그 비참한 모사의 조급함이 만연해 있으니까요.”
“적지만 분명한 독자층이 있다는 사실이 당신을 조금이라도 덜 비관적으로 만들지는 않았습니까?”
“아, 비관주의 얘기는 그만둡시다. 나는 그런 문제로 인터뷰를 할 만한 오베르만(Obermann)1 같은 인물이 아니에요. 임질 걸린 끄적이들을 위한 전용 칸은 따로 있지 않습니까. 르 탕(Le Temps)2이라는 백화점에 가보세요. 거기 가면 ‘비관주의’라는 상품을 작은 상자에 담아 팔고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자연주의에 대해 여쭤본다면요? 어쨌든 당신은 그 가장 열성적인 신봉자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니까요.”
“아주 단순하게 대답하겠습니다. 나는 내가 보고, 내가 살고, 내가 느끼는 것을 최선을 다해 써낼 뿐입니다. 그게 자연주의라면, 더없이 좋지요. 결국 재능 있는 작가와 재능 없는 작가가 있을 뿐입니다. 자연주의자든, 낭만주의자든, 데카당이든, 무슨 이름이든 상관없습니다. 내게 중요한 것은 재능을 갖는 것, 그것뿐입니다!”
“하지만 비평을 그토록 경멸한다 해도, 비평에도 좋은 점이 있다는 것만큼은 인정하시겠지요. 적어도 지금은 예전처럼 당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어느 정도 존중까지 보내고 있으니까요.”
여기서 위스망스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좋은 시절은 지나갔지요.”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바타르 자매(Les Sœurs Vatard)』 시절 말입니다. 매일같이 머리 위로 요강이, 그것도 늘 가득 찬 채로, 쏟아지던 때 말이지요. 샤프롱은 죽었고 베롱은 입을 다물었습니다. 내 책의 부도덕성을 두고 그 친구들이 어찌나 짖어댔던지. 참으로 아름다운 영혼들이었지요. 요즘의 비평들은 그저 멍청할 뿐입니다. 비평가들의 어리석음도 이제는 하나의 판에 박혔고, 증오조차 무뎌졌어요.”
바로 그때, 멋진 붉은 고양이 한 마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오, 오!” 내가 물었다. “그럼 저게 『결혼 생활(En ménage)』에 나오는 그 유명한 바르 드 루유(Barre de Rouille)인가요?”
“그렇습니다.”
“문인들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으시는 모양이군요?”
“될 수 있는 한 적게 어울립니다. 출판사에 대한 불평, 누가 얼마를 버느냐 하는 얘기들, 그런 건 사람을 지치게 하거든요. 그런 되풀이를 견디지 않아도 될 때면, 정말 만족스럽습니다.”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배낭을 메고(Sac au dos)』에 쓴 전쟁 이야기는 당신 자신의 이야기였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애국심에 대한 생각은 굳이 묻지 않겠습니다.”
“정말 그 얘기까지 가면 너무 멀리 가게 되겠지요.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이것뿐입니다. 나는 무엇보다도 과장되고 부산한 인간들을 싫어합니다. 그런데 남부 사람들은 죄다 고함을 지르고, 나를 소름 끼치게 하는 억양으로 말하고, 거기에 몸짓까지 요란하지요. 아니, 머리에는 곱슬곱슬한 아스트라한을 얹고, 뺨을 따라 흑단 울타리 같은 수염을 늘어뜨린 그런 사람들과, 크고 과묵하고 점잖은 독일인들 사이에서라면 내 선택은 뻔합니다. 나는 언제나 마르세유 사람보다는 라이프치히 사람에게 더 큰 친근감을 느낄 겁니다. 사실 프랑스 남부만 아니라면 뭐든 괜찮아요. 내게 그보다 더 혐오스러운 종족은 없으니까.”
나는 이런 말을 굳이 논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거꾸로』의 저자에게 작별을 고하고 악수를 나누었다. 그런데 그 손이 참 묘했다. 몹시 야윈 공주의 손 같았고, 손가락은 가늘고 섬세했다. 요컨대 내 첫인상은 틀리지 않았다. 위스망스는 분명 자기 책들 속에 나오는 그 시큼한 인간혐오자, 그 빈혈적이고 신경질적인 존재였다. 이제 나는 그의 작품들을 간단히 훑어보려 한다.
그는 먼저 『당과 항아리(Le Drageoir aux épices)』라는 다소 평범한 산문시집으로 출발했다. 이어 창녀들을 다룬 첫 소설 『마르트(Marthe)』를 썼다. 이 작품은 1876년 브뤼셀에서 출간되었고, 그토록 점잖은 외양에도 불구하고 풍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프랑스에서 금지되었다. 『목로주점(L’Assommoir)』이 누구나 아는 그 엄청난 돌파를 이루기 전이었다. 『마르트』는 그 뒤 파리에서 다시 출간되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이 책에는 곳곳에 정확한 관찰이 있고, 이미 병적인 문체의 기질도 드러난다. 그러나 내게는 그 문장이 공쿠르 형제(Les Goncourt)를 지나치게 많이 떠올리게 한다. 흥미롭고 생생한 데뷔작이지만, 다소 덜 여문 데가 있고, 아직은 충분히 개인적이지 않다.
이 작가의 기이한 기질, 곧 세련된 파리지앵과 네덜란드 화가가 설명하기 어렵게 뒤섞인 듯한 성향을 보려면 『바타르 자매』에 이르러야 한다. 여기에 검은 유머 한 꼬집, 거칠고 뻣뻣한 영국식 희극 감각을 조금 더해도 좋겠다. 지금 우리가 다루는 작품들의 개성은 바로 이 혼합에서 나온다.
『바타르 자매』에는 좋은 대목들이 많다. 또 이 작품은 1879년에 출간되었는데, 현대문학 속에 철도와 기관차의 풍경을 처음으로, 그것도 대단히 인상적으로 끌어들였다. 제책소 여자 노동자들의 삶을 더럽고도 정확하게 잘라낸 한 토막이다. 얀 스텐(Jan Steen)을 떠올리게 하는 질감을 파리지앵 특유의 재빠르고 세련된 손으로 다룬 것이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내 취향으로는 『결혼 생활』 쪽이 더 좋다. 여전히 이 작가의 작품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책이다.
왜냐하면 그 작품은 특유의 우울을 열어 보이고, 황폐하고 나약한 영혼들의 미묘한 틈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것은 허무주의의 노래다. 더구나 그 노래는 음산한 유쾌함의 번뜩임과 잔혹한 재치의 언어 때문에 한층 더 어두워진다. 사상으로 가득 찬 이 소설은 논리적으로 체념과 방임으로 귀착된다. 그것은 중간 정도의 비참함들에 대한 부제품 같은 『물 흐르는 대로(À vau-l’eau)』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거꾸로』에 이르면 분노가 모습을 드러낸다. 무심한 가면은 찢어지고, 삶을 향한 저주는 거의 줄마다 불길처럼 솟구친다. 앞선 두 권의 차분하고 침울한 철학과는 아주 멀리 와 있는 셈이다. 이것은 광기이고 거품이다. 어떤 시대의 혐오와 경멸이, 모든 동시대 문학 바깥에 서 있는 이 기묘한 소설만큼 격렬하게 표현된 적은 없었다.
내 생각에 위스망스 책의 큰 결함 가운데 하나는, 그의 각 작품마다 결국 하나의 동일한 유형이 중심을 차지한다는 점이다. 시프리앵 티바이유(Cyprien Tibaille)과 앙드레(André), 폴랑탱(Folantin)과 데 제생트(Des Esseintes)는 결국 같은 인물이 다른 환경으로 옮겨 다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인물이 바로 위스망스 자신이라는 사실은 너무도 분명히 느껴진다. 이 점에서 우리는 자기 작품 뒤로 자신을 지우고, 그렇게도 다채로운 인물들을 만들어냈던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의 완전한 예술과는 거리가 멀다. 위스망스는 그런 노력을 해낼 수 없는 사람이다. 그의 냉소적이고 긴장된 얼굴은 페이지마다 모퉁이에서 불쑥 튀어나온다. 아무리 흥미로운 개성이라 해도, 한 인격이 끊임없이 침입해 들어오면 작품의 위대함은 줄어들고, 변주 없는 반복 끝에 독자를 지치게 마련이다.
그의 문체에 대해서는 여기서 길게 말하지 않겠다. 에밀 에네캥(Émile Hennequin)의 분별 있는 글에서 이미 다 논해졌기 때문이다. 그의 몇몇 페이지가 장엄한 아름다움을 지니며 오래도록 명성을 누릴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다만 비평이 대체로 못 본 체해온 다른 점이 하나 있다. 나는 그의 심리 분석, 더 정확히는 그의 인물들, 아니 사실상 그의 단 하나의 인물을 말하고자 한다. 의지는 약하고, 늘 불안하며, 스스로를 괴롭히는 데 능하고, 따지고 분석하기를 좋아하며, 자기 안을 끝까지 들여다볼 수 있어서 자기 병의 체질적 성향을 스스로 설명하고, 그것을 정확하고 힘 있는 문장으로 요약해낼 줄 아는 인물. 바로 이 인물의 분석 속에 이 작가의 한 가지 독창성이 놓여 있다. 내게 그것은 그의 문체만큼이나 중요한 독창성이다. 『결혼생활』의 「치맛속의 위기(La Crise juponnière)」를 읽어보라. 이렇게 미세한 영혼의 구역은 그 전까지 아무도 본 적이 없었다는 걸 떠올려보라. 그 위기에 대한 모노그래프가 얼마나 정확한지, 또 얼마나 학문적인 명석함으로 그것을 보여주는지. 또 한편으로 『거꾸로』의 뛰어난 한 장, 어린 시절의 기억과 신학적 회귀를 그토록 영리하게 풀어낸 장을 읽어보라. 영적 지하실을 탐사하는 이 작업이 얼마나 깊고 또 얼마나 새로운지 보게 될 것이다.
이 작품들 외에도 위스망스는 『파리 크로키(Croquis parisiens)』를 펴냈다. 그는 알로이시위스 베르트랑(Aloysius Bertrand)과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이후 산문시를 하나의 형식으로 다듬으려 시도했다. 그는 그것을 어떤 의미에서는 새롭게 하고 젊게 만들었다. 흥미로운 기교를 사용하고, 백시를 후렴처럼 끌어오고, 시의 앞뒤에 리듬감 있고 기이한 반복문을 배치했으며, 때로는 아예 하나의 리투르넬이나 마지막 송부 같은 것을 따로 덧붙이기까지 했다. 마치 프랑수아 비용(François Villon)과 데샹(Deschamps)의 발라드들처럼. 또 그는 『현대미술(L’Art moderne)』에 묶인 살롱 비평들도 썼다. 이 책은 인상주의를 진지하게 설명하고, 에드가 드가(Edgar Degas)에게 장차 그가 차지하게 될 높은 자리를 부여한 최초의 책이었다. 위스망스는 또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때 장프랑수아 라파엘리(Jean-François Raffaëlli)를 처음 세상에 알린 사람이었고, 오딜롱 르동(Odilon Redon)을 설명하고 널리 알린 사람도 그였다. 예술의 가장 다양한 양상 앞에서 이토록 예민한 감각과 이해력을 지닌 미술비평가가 또 어디 있는가?
요컨대, 언젠가 정의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속된 대중에게 그토록 경멸받아온 위스망스의 몫은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나 자신은 그의 신념을 그다지 많이 공유하지 않는다. 나는 좀 더 건강한 문학, 덜 눈부실지는 몰라도 덜 무성한 문체를 믿는다. 심리 분석에서도 나는 더 일반적이고, 더 넓고, 덜 희귀한 측면을 믿는다. 그런 점에서 오노레 드 발자크(Honoré de Balzac)는 대가로 보인다. 그는 부성애와 인색함 같은 인간의 크고 보편적인 정념들을 놀라울 만큼 훌륭하게 해부해냈다. 내가 위스망스를 진정한 작가가 드문 한 세기 속에서 매우 높은 자리에 놓는다 해도, 동시에 그를 예외적인 존재, 기이하고 병약한 작가, 변덕스럽고 대담하며 손끝까지 예술가인 인물로 보지 않을 수는 없다. 또 멀고도 경직되며 초록빛을 띤 형용사와, 고독하고 당혹스러운 관념을 지닌 또 다른 작가 레옹 블루아(Léon Bloy)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겁에 질린 통사론의 좀먹은 계단을 따라, 이미지의 머리채나 발목을 잡고 질질 끌고 내려오는” 작가다. 그러나 아무리 그 점에 감탄한다 해도, 내게 그것이 걸작을 걸작답게 만드는 그 사유와 문체의 아름다운 건강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A. 뫼니에(A. Meunier)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