쥘 바르베 도르비이
— 『댄디즘과 조지 브러멀(Du Dandysme et de Georges Brummell)』의 제2판 서문



이 책을 제2판이라 부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다. 초판은 몇 부 되지도 않게 찍혀, 몇몇 사람들 사이에서 조용히 건네졌다. 그런데 그런 내밀하고도 은밀한 방식의 유통이 이 책에는 오히려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이제는 그보다 더 넓게 독자들 앞에 내놓으려 하는데, 이번에도 과연 그와 같은 호의를 기대할 수 있을까? 세간의 평판이란 그토록 가벼운 것이어서, 도망치는 척할 때 오히려 따라온다. 이 지독한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차라리 몇 가지 비밀을 슬쩍 흘리는 편이 최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하찮은 물건을 세상에 내놓을 당시, 저자는 그렇게까지 심오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 당시 그는 문학이니 문단의 소음이니 하는 데 별 관심이 없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에게는 자기 생각을 꾸미는 일보다 더 시급한 치장이 있었고, 읽히는 일보다 더 절박한 걱정이 있었다. 그러나 그 시절의 근심 쯤은 이제 웃어 넘긴다. 인생이란 본디 그런 것이 아닌가. 걱정 하나를 비웃음 하나와 맞바꾸는 일이 끝없이 되풀이되는 것, 인생이란 결국 그 전부가 아니겠는가?

『댄디즘과 조지 브러멀(Du Dandysme et de Georges Brummell)』의 저자는 댄디가 아니었다. 이 책을 읽어보면 왜 그런지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 젊었고, 바로 바이런 경으로 하여금 우울한 아이러니를 담아, “내가 곱슬머리의 멋쟁이였던 시절에…”라고 말하게 했던 젊은 나이에 있었다. 그 나이에는 영광 같은 것도 곱슬머리 한 가닥 값에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작가로서의 허세 없이 이 작은 책을 썼다. 다른 종류의 허세야 물론 있었다. 그 점은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그는 그저 자기 자신과, 서른 명쯤 될까 싶은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그 서른 명이란, 정말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고, 자랑하기에는 조금 머쓱한, 이름 없는 벗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허영이 모자란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믿었고, 실제로 또 있었다. 이제는 겸손해졌으니 이정도 쯤은 용서받으리라. 그는 서른 부의 책에 꼭 맞는 서른 명의 독자를 얻었다. 그것은 ‘서른 명의 투쟁’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서른 명의 호의였다!

만약 이 책이 어떤 위대한 주제나 인물에 관한 것이었다면, 몇 부의 인쇄본과 함께 금세 무관심의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을 것이다. 위대한 것은 늘 하찮은 것들로부터 그런 대접을 받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이 책은 한 인물, 그것도 까다로운 사교계에서 우아한 경박함의 완성형으로 통하던 인물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세상 사람치고 스스로를 우아하다고 여기지 않거나, 적어도 우아해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설령 그 욕망을 이미 포기한 사람이라도, 적어도 그 세계를 알아보는 눈쯤은 갖고 싶어 한다. 이 책이 읽힌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내가 이름은 밝히지 않겠지만, 어떤 바보들은 이 책을 이해했다고 으스댔다.

나는 출판업자에게 단언할 수 있다. 바로 그런 자들이 이 책을 살 것이다. 어디에나 허영이 있다! 첫 성공을 만들어낸 것도 허영이었고, 이 작은 책의 두 번째 성공 역시 허영이 만들어낼 것이다. 첫 장에 이런 무례한 문구를 적고 싶은 유혹이 들 정도다. “속물꾼이, 속물꾼에 의해, 속물꾼을 위해.” 속물꾼에게는 모든 것이 자기를 비춰보는 계기가 되며, 이 책은 그들에게 하나의 거울이다. 많은 이들이 그 앞에 와서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고, 거기서 콧수염을 매만질 것이다. 어떤 이는 자기 모습을 알아보려고, 또 어떤 이는 자신을… 브러멀로 꾸며보려 할 것이다!

런던, 저민 스트릿(Jermyn Street)에 위치한 "보" 브러멀 조각상

물론 그것은 헛된 일이다. 브러멀은 애써 흉내 내어 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원래 그런 사람이거나, 아니거나 둘 중 하나다. 하찮은 세계의 하찮은 군주 브러멀에게도 다른 왕들 못지않게 자신만의 신수권과 존재 이유가 있다. 다만 요즘 들어 이 멍청한 민중들에게 스스로 주권자라고 믿게 만들었다면, 살롱의 속물 무리가 거리의 군중처럼 자기들만의 환상을 품는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또 무엇이겠는가?

이 작은 책은 그런 환상에서 깨어나게 할 것이다. 그들은 이 책에서 브러멀이 아주 드문 종류의 개성이라는 사실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그저 태어나는 것으로 충분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실제로 그가 자신을 완성하려면 극도로 귀족적이고 복잡한 사회라는 토양이 꼭 필요했다. 또 그들은 브러멀이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조건이 필요한지, 그리고 정작 자기들에게는 그 조건들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도 보게 될 것이다. 『댄디즘』의 저자는 그 조건들을 하나하나 헤아려보려 했다. 그것들은 하찮아 보이지만 막강한 힘을 지닌 것들, 여자들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들을 지배하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었다. 하지만 저자도 잘 알고 있었다. 이 책은 처세의 지침서가 아니며, 우아함의 마키아벨리들이란 정치의 마키아벨리들보다 더 어리석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물론 정치의 마키아벨리들 역시 이미 충분히 어리석지만 말이다! 결국 이것은 역사의 작은 파편, 고고학적 단편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미래의 속물꾼들이 황금 화장대 위에 진기한 물건처럼 올려놓을 만한 조각 말이다. 물론 그들에게 그런 화장대가 아직 남아 있다면. ‘진보’라는 것이 정치경제학과 영토 분할을 앞세워 인류 전체를 점점 누더기 입은 족속으로 만들어가고 있으니, 속물꾼 자체를 없애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도르세풍의 화장대만큼은 불평등하고 추문스럽다며 없애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콜-톡(Coll-Toc)이 그린 쥘 바르베 도르비이

어쨌든 이 책은 처음 쓰였던 그대로 여기 있다. 손댄 곳도 없고, 지운 대목도 없다. 여기저기에 주석 몇 개를 덧붙였을 뿐이다. 시대의 엄숙함이라는 것이 저자를 종종 웃게 만들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댄디즘』의 저자가 오늘 와 이 작은 책을 젊은 날의 철없는 장난으로 여기고 변명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조가 다소 가볍다 해도 말이다. 아니, 그는 오히려 그 점을 기꺼워할 것이다. 그런 가벼움에 질색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누가 몰아세운다면, 그는 근엄한 신사들 가운데서도 가장 고집 센 자들 앞에서도 자기 책이 여느 역사책 못지않게 진지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 작은 불빛 아래 우리가 보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과 그의 허영, 사회적 세련됨, 그리고 이성만으로는 도무지 다 헤아릴 수 없는, 그러나 그럴수록 더 매혹적인 현실의 영향력들이다. 이성, 그 커다란 바보 말이다. 그런데 세상과 그 허식과 그 업적에서 가장 멀리 물러난 사람들, 그 공허를 가장 깊이 경멸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이것보다 더 중대한 문제가 또 어디 있겠는가?

그들에게 물어보라. 그들의 눈에는 모든 허영이 결국 다 같은 것이 아닌가? 이름이 무엇이든, 어떤 몸짓으로 자신을 꾸미든 말이다. 만약 댄디즘이 파스칼의 시대에 이미 존재했다면, 프랑스에서 가능한 방식으로 하나의 댄디였던 파스칼은 포르루아얄에 들어가기 전에 그 역사를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섯 필 말이 끄는 마차의 사나이, 바로 그 파스칼 말이다! 또 엄격함의 또 다른 호랑이였던 랑세 역시 라 트라프의 밀림 속으로 파고들기 전에, 아나크레온 대신 제시 대위를 우리에게 번역해주었을지도 모른다. 랑세 역시 댄디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사제 댄디였으니, 수학자 댄디보다야 한층 더 대단하지 않은가. 이쯤 되면 댄디즘의 영향력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보일 것이다! 랑세의 생애를 쓴 근엄한 수도자 돈 제르베즈는 그의 매혹적인 의상들을 얼마나 사랑스럽게 묘사해놓았는지, 마치 그것을 입고 싶다는 지독한 욕망을 우리 안에 먼저 일으켜놓고, 그 유혹을 물리친 공로까지 함께 안겨주려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댄디즘』의 저자가 자신을 파스칼이나 랑세와 같은 사람이라고 여긴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한 번도 얀세니스트였던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며, 트라피스트도 아니다… 아직은!

쥘 바르베 도르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