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스타브 플로베르
루이즈 콜레1에게
크루아세, 1852년 1월 16일, 금요일 저녁
(…)
친애하는 벗이여, 『감정 교육(L’Éducation sentimentale)』2의 몇몇 부분에 대해 당신이 보여주시는 지나친 열광에 놀라고 있습니다. 제게도 그것은 훌륭해 보입니다만, 당신이 말씀하시듯 다른 부분들과 그토록 큰 간격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책에서 쥘(Jules)에 관한 부분 전체를 떼어내 하나의 독립된 덩어리로 만들자는 의견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 책이 어떤 방식으로 구상되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쥘이라는 성격은 앙리(Henry)와의 대조가 있기 때문에만 빛을 얻습니다. 두 인물 가운데 하나만 따로 떼어놓으면 힘이 약해집니다. 제가 처음에 떠올린 것은 앙리 뿐이었습니다. 쥘은 그에 대한 대비가 필요했기 때문에 구상된 인물입니다.
당신의 마음을 움직인 페이지들, 예술에 관한 부분 등은 그다지 쓰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다시 쓰지는 않겠지만 지금 쓴다면 더 잘 쓸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듭니다. 그것은 좀 더 종합적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이후로 저는 미학 부분에서 진전을 이루었습니다. 적어도 제가 일찍이 취했던 입장을 더 굳혔다고는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아! 제가 머릿속에 있는 그 문체 그대로 글을 쓸 수 있다면, 얼마나 대단한 작가가 되겠습니까! 제 소설에는 꽤 괜찮게 여겨지는데도 당신이 언급하지 않은 장이 하나 있습니다. 그들이 아메리카로 여행하는 장,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싫증을 느끼는 그 피로가 조금씩 따라붙는 장입니다. 이탈리아 여행 대목에 대해서도 당신은 제가 스스로 했던 것과 같은 생각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제 허영심의 작은 승리 하나를 위해 너무 큰 대가를 치르는 셈입니다. 저도 인정합니다. 다만 짐작했을 뿐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제가 몽상가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저는 볼 줄 압니다. 근시안들이 사물에 바짝 얼굴을 들이대고 보듯, 저는 사물의 가장 미세한 부분까지 봅니다.
문학적으로 말하자면, 제 안에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소리치는 것과 서정성, 독수리의 큰 비상, 문장의 모든 울림과 사유의 정점들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하나는 가능한 한 진실을 파고 또 파며, 작은 사실도 큰 사실 못지않게 드러내기를 좋아하고, 자신이 재현하는 사물을 물질적으로 느끼게 해주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웃기를 좋아하고, 인간의 동물적인 면에서 즐거움을 느낍니다. 『감정 교육』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제 정신 안의 이 두가지 경향을 융합하려는 시도였습니다. 한 권의 책에는 인간적인 것을, 다른 한 권의 책에는 서정성을 담았더라면 오히려 더 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패했습니다. 이 작품에 어떤 수정을 가하더라도—어쩌면 제가 그렇게 하게 될지도 모르지만—그것은 언제까지나 결함을 지닌 채 남을 것입니다. 너무 많은 것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책이 약해지는 것은 언제나 결핍을 통해서입니다. 하나의 장점은 결코 결점이 아닙니다. 과잉이란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장점이 다른 장점을 잡아먹는다면, 여전히 그것을 장점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요컨대 『감정 교육』은 다시 써야 합니다. 적어도 전체의 균형을 다시 잡고, 두세 장을 다시 만들고, 무엇보다도 빠져 있는 한 장을 써야 합니다. 같은 줄기에서 어째서 필연적으로 두 갈래가 나와야 했는지, 다시 말해 어째서 어떤 행위가 이 인물에게는 이런 결과를 낳고 다른 인물에게는 다른 결과를 낳았는지를 보여주는 장 말입니다. 원인들은 제시되어 있고 결과들도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원인에서 결과로 이어지는 연결은 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 책의 결함이며, 제목을 배반하는 방식입니다.
제가 당신께 말씀드렸듯, 『감정 교육』은 하나의 시도였습니다. 『성 앙투안느의 유혹(La Tentation de saint Antoine)』 또한 시도였습니다. 저는 거기서 서정성도, 움직임도, 무질서도 전적으로 자유로운 주제를 붙들고 있었으므로, 그때는 제 본성 안에 온전히 머물러 있었고 그저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 작품을 쓰며 18개월 동안 제가 누렸던 그 문체의 황홀경은 다시는 되찾지 못할 것입니다. 제 목걸이의 진주들을 얼마나 정성을 다해 깎아냈는지요! 다만 한 가지를 잊었을 뿐입니다. 그것들을 꿰는 실을 말입니다. 두 번째 시도는 첫 번째보다 더 형편없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세 번째 시도에 와 있습니다. 이제는 성공하든지, 아니면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지든지 해야 할 때입니다.
제게 아름답게 여겨지는 것, 제가 만들고 싶은 것은 아무것에도 기대지 않는 책, 외적인 매달림 없이 문체 내부의 힘만으로 스스로 서는 책입니다. 마치 아무 받침 없이도 공중에 떠 있는 지구처럼 말입니다. 거의 주제가 없는 책, 혹은 적어도 주제가 거의 보이지 않는 책.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 말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작품은 재료가 가장 적은 작품들입니다. 표현이 사고에 가까워질수록, 말이 그 위에 밀착되어 사라질수록, 그것은 더 아름답습니다. 저는 예술의 미래가 이 길에 있다고 믿습니다. 예술은 자라나면서 가능한 점점 더 비물질화되고 있습니다. 이집트의 탑문에서 고딕의 첨두창에 이르기까지, 인도인들의 2만 행짜리 시에서 바이런의 분출에 이르기까지, 형식은 능숙해질수록 점점 옅어집니다. 모든 전례와 규칙과 척도를 떠나고, 서사시를 버리고 소설로, 운문을 버리고 산문으로 갑니다. 더 이상 어떤 정통성도 인정하지 않으며, 그것을 낳는 각각의 의지만큼 자유롭습니다. 이러한 물질성으로부터의 해방은 모든 곳에서 발견되며, 정부 형태들 또한 동양의 전제정에서 미래의 사회주의에 이르기까지 이 길을 따라왔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주제도 추한 주제도 없는 것입니다. 순수예술의 관점에 선다면, 거의 하나의 공리처럼 주제란 아예 없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문체란 그 자체로 사물을 바라보는 절대적인 하나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뜻하는 바를 펼쳐 보이려면 한 권의 책이 통째로 필요할 것입니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늙어서, 더 쓸만한 것이 없어졌을 때 써보겠습니다. 저는 소설을 온 마음으로 쓰고 있습니다. 『성 앙투안느의 유혹』을 쓰던 그 좋은 시절이 다시 올까요? 다만 결과만은 달라야 할 텐데, 맙소사! 저는 천천히 갑니다. 나흘 동안 다섯 쪽을 썼지만, 지금까지는 즐겁습니다. 여기에서 다시 평온을 되찾았습니다. 날씨는 끔찍하고, 강은 바다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며, 제 창 아래로는 고양이 한 마리 지나가지 않습니다. 저는 큰 불을 피워 놓고 있습니다.
루이 부이예(Louis Bouilhet)3는 그가 부도덕한 책을 썼다는 이유로 어머니와 마을 전체가 그에게 화를 냈습니다.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재치 있는 사람으로 여기지만, 곧 못난 사람처럼 취급합니다. 만일 제가 그의 작품과 가치에 대해 조금이라도 의심을 품고 있었다면, 이제는 더 이상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그에게 부족했던 것은 바로 이런 공인이었습니다. 자기 가족과 자기 고장에서 버림받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인정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아주 진지하게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승리에 대한 복수가 되어주는 모욕들이 있고, 자존심에는 환호보다 야유가 더 달콤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미래의 전기에서, 그는 역사의 모든 규칙에 따라 위대한 인물로 분류될 것입니다.
당신은 편지에서, 제가 다정함으로 가득한 편지를 약속했다고 상기시켜 주십니다. 저는 당신께 진실을 보내드리려 합니다. 아니면 당신이 더 좋다면, 당신을 향한 제 감정의 결산을 하려는 것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파산 때문이 아니라, 아, 이것은 제법 우스운 말장난이군요, 그 말의 높은 의미에서, 마음을 그 불가능한 만나 앞에 벌어진 채 남겨두는 그 놀랍고 꿈같은 의미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저는 젊은 시절 그 문제들을 너무 깊이 파헤쳐 보았기 때문에, 남은 생애 내내 그 일로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입니다.
제가 당신께 느끼는 것은 우정, 끌림, 존경, 마음의 다정함, 감각의 충동이 뒤섞인 어떤 복합적인 전체입니다. 그것의 이름을 모르겠습니다만, 제게 견고한 것으로 보입니다. 제 영혼 안에는 당신을 위한, 젖은 축복 같은 것이 있습니다. 당신은 거기 한구석, 오직 당신만의 작고 부드러운 자리에 있습니다. 제가 다른 이들을 사랑하게 되더라도, 당신은 그 자리에 여전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적어도 제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당신은 마치 아내처럼, 총애받는 이처럼, 다시 돌아가게 되는 사람처럼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반대를 부정하는 것은 궤변이 아니겠습니까? 당신 자신을 잘 들여다보십시오. 당신이 품었던 감정 가운데 사라져버린 것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아닙니다. 모든 것은 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전부 남습니다. 마음속에 간직된 미라들은 결코 먼지가 되어 흩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환기구 위로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면, 저 아래에서 그 미라들이 뜬 눈으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감각은 언젠가 우리를 다른 곳으로 이끕니다. 변덕은 새로운 반짝임들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때 당신이 원하시던 방식으로 당신을 사랑했더라면, 지금의 저는 당신을 이만큼 사랑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음에서 한 방울씩 스며 나오는 애정은 마침내 종유석을 만듭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휩쓸어 가버리는 거대한 급류보다 낫습니다. 이것이 진실이며, 저는 그곳에 머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의 루이즈여! 저는 당신의 삶이 어떤 식으로든 부드럽기를, 모래가 깔리고 꽃과 기쁨으로 가장자리가 둘러지기를 바랍니다. 저는 당신의 아름답고 선하며 솔직한 얼굴을 사랑합니다. 당신 손의 압력과, 제 입술 아래 닿는 당신 살갗의 감촉을 사랑합니다. 제가 당신께 매정하다면, 그것은 저를 괴롭히고 때로는 잠기게 하는 슬픔, 쓰디쓴 신경질, 죽음 같은 권태의 반작용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제 안에 깊은 곳에는 언제나 제 고장의 중세적 우울의 뒷맛 같은 것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안개 냄새가 나고, 동방에서 실려 온 페스트의 냄새가 나며, 루앙의 오래된 목조 가옥들처럼 조각 장식과 스테인드글라스와 납지붕 박공을 달고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나의 아름다운 이여, 당신은 바로 그 벽감 속에 살고 있습니다. 다만 거긴 빈대가 많으니 좀 긁으셔야 할 겁니다.
당신의 장밋빛 입에 다시 한 번 입을 맞춥니다.
당신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