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토냉 아르토
자크 리비에르와의 서신
이 서간집은 한 문예지 편집자가 젊은 시인의 작품을 거절하는 편지에서 시작된다. 처음의 문제는 단순해 보인다. 시를 발표할 수 있는가, 없는가. 그러나 이 서신이 곧 드러내는 것은 작품의 채택 여부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물음이다. 과연 존재가 무너지고 흩어지는 상태에서 글을 쓸 수 있는가. 생각이 자기 자신을 붙들지 못하고 새어 나가는 바로 그 순간에도, 인간은 여전히 쓰고 말할 수 있는가.
아르토에게 글쓰기는 이미 형성된 생각을 언어로 옮기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완성된 의미를 전달하는 수단이라기보다, 생겨나자마자 붕괴해 버리는 내면의 운동을 가까스로 추적하는 시도에 가깝다. 그렇기에 그의 문장은 어떤 결론의 전달이라기보다, 자기 자신과 일치하지 못하는 정신의 흔적이 된다. 여기에는 고통의 호소가 있지만, 그것이 단순한 증상의 보고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정신이 스스로를 소유하지 못하는 상태가 어떻게 언어의 문제로, 더 나아가 존재의 문제로 번져 가는지 점차 드러난다.
리비에르는 처음에 그 시들이 아직 충분한 응집성과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단순한 거절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아르토의 글에서 결함만이 아니라 어떠한 가능성을 본다. 리비에르가 시의 완성을 권유할수록, 아르토는 자신에게 결정적인 문제가 완성보다 더 앞선 곳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더 이상 한 편의 시가 매끈하게 완성되었느냐가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균열과 중단을 안은 의식이 과연 문학의 바깥으로 밀려나야 하느냐는 질문이다.
이때부터 이 서신들은 문학에 관한 논의이면서 동시에 문학의 한계를 시험하는 기록이 된다. 보통 작품은 통일성, 균형, 완결 같은 기준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아르토에게 그러한 기준부터 이미 의심스럽다. 의식 자체가 균질하지 않고, 내면의 운동이 처음부터 파열을 품고 있다면, 그것을 충실하게 드러내는 글 역시 매끄러운 전체라기보다 끊기고 흔들리는 형식을 띨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파편성은 실패의 흔적이 아니라, 어떤 사유가 자기의 진실을 유지하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형식이 된다.
이 편지들은 시를 둘러싼 논의에서 출발하지만, 끝내 문학의 조건 자체를 묻는다. 형식의 요구와 무너지는 현실이 부딪히는 자리에서, 아르토와 리비에르는 글쓰기의 가능성과 한계를 함께 보여준다. 이 책은 실패의 문서라기보다, 실패와 불가능을 통과하면서도 결국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은 한 존재의 증언으로 남는다.
발췌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시들을 『누벨 르뷔 프랑세즈(La Nouvelle Revue Française)』에 싣지 못하게 되어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작품들에 큰 흥미를 느껴, 선생님을 직접 만나 뵙고 싶습니다. 금요일 오후 네 시에서 여섯 시 사이에 편집부로 들르실 수 있다면, 기쁘게 만나 뵙겠습니다. (15쪽)
제가 진정 답을 듣고 싶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결함이 있지만 강렬한 아름다움이 깃든 시가, 형식적으로는 완벽하지만 내적 울림이 크지 않은 시보다 문학적 진정성이나 작용하는 힘에 있어 열등하다고 보아야 합니까? 물론 『누벨 르뷔 프랑세즈』와 같은 잡지가 일정한 형식적 수준과 재료의 순수성을 요구한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런 기준을 차치하고서라도 제 사유의 본질이 정말로 그토록 혼탁한 것입니까? 그 안에 흩뿌려진 불순물과 망설임들로 인해 전체적인 아름다움조차 그토록 힘을 잃어 문학적으로 성립할 가치조차 없는 것입니까? 여기에는 제 사유 전체의 존립이 걸려 있습니다. 제게 이것은, 시로든 산문으로든 계속해서 사유할 권리가 있는가 없는가를 묻는 문제와 다름없습니다. (19–20쪽)
제 사유를 파괴하는 어떤 것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제가 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을 막지는 않지만, 말하자면 저를 일종의 ‘정지 상태’에 머물게 합니다. 교묘하게 제가 찾아낸 말들을 훔쳐가고, 정신적 긴장을 약화시키며, 사유의 덩어리 자체를 그 본질 속에서부터 서서히 파괴합니다. 심지어 사유가 스스로를 표현하는 데 쓰이는, 사유의 가장 분리할 수 없고 가장 국소적이며 가장 살아 있는 굴곡들을 정확히 번역해 내는 그 표현의 기억마저 제게서 앗아갑니다.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제 상태를 정확히 묘사할 수는 없습니다. (31쪽)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겠지요. 이런 문제들에 대해 의견을 내기 위해서는 더 높은 정신적 응집력과 더 깊은 통찰력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글을 쓰고자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저의 약점이자 어리석음입니다. (35쪽)
정신을 망가뜨리는 것은 바로 절대입니다. 정신이 긴장을 유지하려면 한계가 필요하며, 그 길 위에 경험이라는 축복받은 불투명함이 나타나야 합니다. 광기에 대한 유일한 치료는 사실들의 순수성입니다. (46쪽)
왜 거짓말을 해야 합니까? 삶의 외침 그 자체인 것을 왜 굳이 ‘문학’의 층위로 끌어올리려 애써야 합니까? 영혼의 뿌리 뽑을 수 없는 본질에서 나온 것, 현실의 신음과도 같은 것에 왜 허구의 외양을 입혀야 합니까? (61쪽)
제 최근의 시들은 분명한 진전을 보여 주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것이 정말로 전부 출판할 수 없을 만큼 엉망인가요? 차라리 저는 존재하지 않는 제 모습 그대로, 뿌리 뽑힌 제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고 싶습니다. (63쪽)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는 ‘마음의 간헐성’을 묘사했습니다. 이제는 ‘존재의 간헐성’을 묘사해야 할 때일지도 모릅니다. (73쪽)
작가에 대하여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 1896–1948)
프랑스의 시인, 극작가, 배우이자 연극 이론가. 1896년 마르세유에서 태어나 1920년대 중반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여했으나 곧 결별했다. 『연극과 그 이중(Le Théâtre et son double)』을 비롯한 저작을 통해 현대 연극과 연극 이론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평생에 걸친 정신적 고통과 장기 입원 속에서도 집필과 드로잉을 멈추지 않았고, 1948년 이브리쉬르센에서 사망했다.
자크 리비에르(Jacques Rivière, 1886–1925)
프랑스의 비평가, 작가, 편집자. 1886년에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억류 생활을 했으며, 전후 프랑스로 돌아와 1919년부터 1925년까지 『누벨 르뷔 프랑세즈(La Nouvelle Revue Française)』의 편집장을 맡았다.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를 비롯한 동시대 작가들의 문학적 가치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폴 클로델(Paul Claudel), 폴 발레리(Paul Valéry) 등과의 교류 속에서 전후 프랑스 문학비평의 중요한 기준을 마련했다.


